글귀는 안 드릴게요
"여자친구랑 1주년 기념으로 편지 쓰고있는데 좋은 글귀 하나 추천드립니다. 아직 여자를 잘 몰라서 뭐라고 해야 감동받을지 모르겠습니다.." (블라인드 썸·연애, 2019년 12월)
그 글 댓글에 누가 "그냥 네 속마음"이라고 썼는데, 퉁명스러워도 그게 답이에요.
좋은 글귀를 빌려 오면 글귀는 좋은데 편지가 안 좋아집니다. 여자친구도 그 글귀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거든요. 본 적이 없어도 티가 나고요.
상대를 잘 몰라도 됩니다
기념일 편지에서 감동은 지난 1년 동안 둘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일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데서 와요.
그 1년은 본인이 겪으셨잖아요.
100일이든 1주년이든 결혼기념일이든 편지에 들어갈 건 같습니다. 그 기간에 있었던 일 하나, 다음 기간에 대한 약속 하나.
기간이 길어지면 고를 일이 많아질 뿐이에요.
100일 편지는 첫인상 하나면 됩니다
에펨코리아에 여자친구가 100일 편지를 원한다는 글이 올라왔을 때 댓글에 항목이 쭉 달렸어요.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 좋아진 이유, 좋았던 기억, 미안한 기억, 앞으로 어떻게 만나고 싶은지, 꼭 해보고 싶은 거, 여친의 의미.
이걸 다 쓰면 연애 보고서가 됩니다.
100일이면 그 목록에서 하나만 고르세요. 첫인상이 제일 쉬워요.
처음엔 말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100일 지나고 보니 나한테만 말이 없었던 거더라. 다음 100일엔 네가 먼저 말 걸게 만들어 볼게.
처음 봤을 때 뭐라고 생각했는지, 지금 보니 그게 맞았는지 틀렸는지요. 이 두 줄에 있었던 일 하나와 약속 하나가 다 들어 있어요.
1주년 편지는 제일 힘들었던 날로 가세요
1년이면 일이 많죠. 그럴 땐 좋았던 날 말고 힘들었던 날을 고르시면 됩니다.
좋았던 날은 사진에 다 있어요. 힘들었던 날은 사진이 없죠. 그래서 편지에 쓸 값어치가 있는 거예요.
그 블라인드 글 댓글에 이런 제안도 있었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생 손 놓지 않겠다고. 힘들때 의지가 되어주는 사람으로 항상 옆에 있겠다고." (같은 글 댓글)
좋은 말인데 이대로 쓰면 글귀예요.
편지가 되려면 그 앞에 힘들었던 날이 있어야 합니다.
예시
3월에 너 이직 면접 떨어지고 나한테 괜찮다고만 하던 날, 나는 괜찮지 않은 거 알면서 모른 척했어. 그게 맞았는지 아직 모르겠어. 다음엔 모른 척 안 할게.
"다음엔 모른 척 안 할게"가 곧 손 놓지 않겠다는 말이죠. 문장은 짧아지고 뜻은 커집니다.
결혼기념일 편지는 알고 있다는 편지예요
"남편은 소파에 앉아있고 저는 그 앞에 바닥에 앉아서 거실테이블에서 남편에게 보내는 결혼기념일 1주년 기념 편지를 쓰고 있는데 남편이 자기 보는 앞에서 편지 쓰는게 똥매너라고 하네요?" (블라인드 결혼생활, 2021년 12월)
댓글은 남편 편이 아니었어요. "편지는 은밀하고 서프라이즈여야한단 고정관념이 있으신가보네", "아니… 주는 거에 고마워해야되는거 아닌가..".
저는 이 글이 결혼기념일 편지의 요점이라고 봐요.
결혼하면 서프라이즈가 어렵습니다. 같은 집에 사니까요.
그래서 결혼기념일 편지에서 힘이 센 건 놀라움 대신 이거예요. 올해 그 사람이 뭘 견뎠는지 내가 알고 있다.
남편 앞에서 쓰든 뒤에서 쓰든, 이런 두 줄이면 상관없죠.
올해 당신 회사에서 팀 바뀌고 석 달 동안 밤 11시에 들어왔잖아. 나 그때 한 번도 안 물어봤는데 알고는 있었어. 내년엔 물어볼게. 대답 안 해도 되니까.
결혼 20년이라고 20년 치를 쓰진 않아요
올해만 쓰시면 됩니다.
20년 편지에 20년을 쓰면 회고록이에요.
기념일 편지는 늘 지난 한 기간이에요. 100일이면 100일, 1년이면 1년, 20년 차면 20년째 그 해.
올해 이 사람이 견딘 것 하나, 내년에 내가 할 것 하나.
축하는 마지막에 쓰세요
있었던 일 하나를 고르고, 그 일이 나한테 뭐였는지 한 줄 쓰고, 약속 하나를 쓰고, 끝에 기념일 축하 한 줄.
첫 줄에 "1주년 축하해"부터 쓰면 그 다음 줄이 또 막힙니다. 생일 편지랑 똑같아요.
저희가 AlwaysYou에 생일·기념일 편지 용도를 만들 때도 마지막 문구를 "오늘을 함께해줘서 고마워"로 두고, 그 앞 문구를 "다음 한 해도 같이 걸어가자"로 뒀어요. 있었던 일, 약속, 그다음에 고맙다는 순서죠.
어디에 쓰시든 그 순서면 글귀 없이도 편지가 됩니다. 올해 그 사람이 견딘 일, 하나 떠오르시나요?